의약품 자동판매기 대신 심야공공약국을

[기고문] 의약품 자동판매기 대신 심야공공약국을

[기고] 의약품 자동판매기 대신 심야공공약국을

최진혜 늘픔약사회 운영위원

최근 논의되고 있는 의약품 자동판매기(약 60여 개의 일반의약품을 약사와 화상 통화 후 구매)를 보며 안전성에 대한 고민과 동시에 의료민영화 흐름의 큰 물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약품 자동판매기는 단순히 첨단 ICT 기술의 결과물일 수 있지만, 탱자가 바다를 건너면 낑깡이 되듯 한국 사회에서 의약품 자동판매기는 단순한 판매 그 이상의 것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보건복지부는 이를 위한 약사법 개정안을 오는 6월 입법예고를 하고 10월에 국회에 상정하겠다고 하니 사회적 논의가 충분히 가능할지 우려가 크다.

의약품 자동판매기는 ‘국민 편의’를 위해 보건복지부가 건의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 출발은 신산업투자위원회와 대통령이 주재하는 규제개혁장관회의를 통해 나왔다. 즉, 의약품 자동판매기는 국민 편의 보다는 ‘규제 개혁’과 ‘경기 대응’을 위한 안이다. 자동판매기가 생산, 판매되고, 그것을 통해 이루어진 매출의 수치는 고스란히 규제 개혁을 통한 경기진작의 결과가 되는 것이다.

편의점

의약품 판매의 더 안전하고 효과적인 대안 ‘심야공공약국’

이미 2012년에 ‘국민 편의’를 이유로 24시간 편의점 안전상비약 판매가 허용된 바 있다. 다시 말해 지금도 언제든 24시간 편의점에서 소화제, 해열제 등 13개의 안전상비의약품은 구매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정부가 심야 시간 의약품 접근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었다면, 규제개혁 위원회가 아닌 보건복지부에서 각 지자체에서 이미 시행 중인 심야공공약국에 관심을 기울였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더 안전하고 효과적인’ 대안에 보건복지부가 주목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그러니 ‘국민 편의’와 ‘그래도 안전하다’를 내세우는 귀를 닫은 정부의 태도에 대해 장차 원격의료를 허용하려는 꼼수가 아니냐는 의심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닐까.

현재 제주도와 대구광역시, 경기도에서는 지자체의 예산 지원으로 심야공공약국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특히 제주특별자치도의 경우 도내 14개의 심야공공약국을 운영하며 도민들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실제 2012년 국회 국정감사 모범사례로 선정되었고, 2013년에는 ‘대한민국 지역사회복지대상’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지자체마다 다르겠지만 1년에 2억~3억 정도의 예산이면 새벽에도 화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약사와 대면 상담을 하고, 약 구매가 가능하다. 물론 약사법이 개정되지 않아도 되고, 의료민영화 흐름이 아니냐는 오해도 해소될 수 있다. 그리고 심야공공약국은 의약품 자동판매기에 비할 수 없을 정도의 장점도 많다.

먼저 의약품 오남용을 예방하고, 안전한 약물 사용의 측면에서 장점이 훨씬 크다. 이를테면 제주도의 심야공공약국은 매달 1500 여명이 다녀가는데, 이 중 약 3% 정도는 이미 다른 약을 복용 중이다. (사실상 이 부분 때문에 편의점 판매도 불안한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환자들은 좀 더 신중한 상담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고혈압 환자의 경우 진통제 선택에 있어 혈압 상승의 부작용이 있는 나프록센 성분 보다는 타이레놀 성분이 더 적합할 수 있다. 또한 사소한 증상이지만 급성 질환인 경우가 가끔 있는데, 협심증 증세의 경우 초기에는 소화불량과 매우 흡사하다. 이런 경우에는 병원진료를 반드시 권유하고, 필자의 경우에는 실제로 내원했는지 확인하기도 한다. 물론 원격으로 이런 상담이 가능하지 않겠냐고 하겠지만 어차피 자판기까지 가든 약국까지 가든 가야 한다면 효과적인 상담은 대면 상담에 비할 바 없을 것이다.

음주의 문제도 고려되어야 하는데, 음주 후 타이레놀 복용은 간독성으로 매우 위험하다. 예를 들어 보자. 음주한 환자가 약을 구매하는 경우, 대면상담은 환자의 음주여부를 대화뿐만 아니라 실제 냄새를 통해서도 파악이 가능하다. 하지만 원격 상담으로는 환자의 답에만 의존해야 하니 안전성에 구멍이 있을 수도 있다.(실제 필자가 약국에서 만나 환자분들 중 본인의 음주사실을 숨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반대로, 주취 진료가 문제가 되었듯 한밤에 주취 상태의 약사가 투약하는 것 역시 원격 판매로는 예방할 수 없다. 이렇듯 수많은 허점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심야공공약국이라는 대안이 아닌 의약품 자동판매기를 설치하자는 정부의 안에 우려를 표할 수밖에 없다.

(자료사진)

심야공공약국, ‘돈 안 되는 공공 정책’으로 밀려나

심야공공약국의 경우 전화 상담까지 무료로 가능하다. 병원으로 바로 가야할지 약국에 적합한 의약품이 있는지 환자는 알 수가 없다. 그럴 때 전화로 상담할 수 있도록 심야공공약국에서는 전화 상담 시스템을 구축하고 그 결과를 통계로 남겨두고 있어 비응급 시의 일반의약품 구매뿐만 아니라 응급 시에 전화로 상담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는 효과도 있다.

더불어 심야공공약국의 경우 처방전 조제까지 법적으로 가능하므로 혹여 주간 업무로 처방 조제를 하지 못한 노동자들에게도 하나의 공익적 약국 서비스가 될 수 있다. 그 밖에 경기도의 경우 “따복사업(따뜻한 복지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가출 청소년들에게 건강 상담, 의약품 지원, 센터 연계 등을 도와주는 청소년 돌봄 약국 서비스와 자살 고위험자를 자살예방센터로 연계하는 자살방지 게이트키퍼 약국 서비스도 함께 하고 있다. 일반의약품 판매 뿐 아니라 처방전 조제와 함께 지역 사회와 접촉면이 넓은 약국의 특성을 이용한 공공 서비스를 심야시간 대로 확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정부는 늘 그렇듯 처음에는 반대 여론을 의식해 의약품 자동판매기를 ‘약국 앞’에만 설치하고 ‘약사에게 운영을’ 맡길 테니 문제가 없다 할지 모르지만 물꼬를 터놓으면 물길은 커지기 마련이다. 1000~2000만원의 설치비용을 감안하면 아마 늦은 시간까지 사람이 북적이는 역세권이나 유흥가 주변마다 자동판매기가 설치될 가능성이 높다. 기업이 소유하고 약사를 고용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 또한 수익을 위해 자판기 앞면, 옆면에 피임약, 진통제 등 의약품에 대해 상시적으로 광고를 할 가능성도 높다. 아무리 병원진료 없이 구매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이라도 과자가 아닌 이상 약 그 자체의 특성상 효과와 위험을 동시에 가지는데, 자동판매기 허용으로 오남용의 확률은 커질 수밖에 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일반의약품은 꼭 약국 내에서 판매할 필요가 없다’는 약사법 개정이 의료민영화의 초석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약사법 개정은 현재도 문제가 되고 있는 온라인 약국, 중고 시장 등에서 무분별한 의약품 판매를 부추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업이 의약품 자동판매기 수 천대를 전국적으로 운영하며 약사를 고용할 수 있게 한다면, 지금도 약국 및 의료기관의 소유를 원하는 대기업들이 “우리도 의사, 약사를 고용해서 약국, 병원을 운영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할 때 보건복지부는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약도 원격 화상 통화로 구매할 수 있는데, 간단한 진료라고 원격으로 못할 게 뭐 있냐”며 관련 기업들이 국민의 편의성을 내세운다면 과연 실정법 어디까지가 안전을 위한 브레이크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의약품 자동판매기가 존재하는 동시에 의료 공공성도 탄탄하게 갖추어진 독일, 영국, 스웨덴과 비교되는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경기도의 한 지역에서 시민들의 불편 해소를 위해 시청에 심야약국이 설치되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관할보건소는 이것이 약국 외 의약품 판매에 해당, 단속할 수도 있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비록 공공적 목적이라도, 의약품의 안전한 관리를 위해 약사법이 존재하는 만큼 약사법을 느슨하게 적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약사법은 의약품의 안전성을 가장 중시하고 있다. 이러한 약사법을 스스로 허물만큼 의약품 자동판매기 허용이 중대하거나 시급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애초의 의약품 자동판매기는 기술 그 자체였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안전망마저 규제로 인식하는 빈곤한 철학을 가진 박근혜 정부를 만나는 순간, 심야공공약국과 같은 좋은 대안은 ‘돈 안 되는 공공 정책’으로 밀려나고 의약품마저 자본 증식의 수단이 되고 만다. 모든 안전사고는 이윤을 위한 과도한 욕심에서 생겨났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민중의 소리 / 최진혜 늘픔약사회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