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하나의 벽만 남기를

[기고문] 올해는 하나의 벽만 남기를

[최진혜 칼럼] 올해는 하나의 벽만 남기를

연말연시에는 누구나 생각이 많아집니다. 그리운 이도 많아지고, 아쉬운 기억도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저 역시 생각이 많아지는 터라 지난 다이어리를 뒤적이며 한 해를 되돌아봅니다.

2014년 초반은 사정없이 몰아쳤던 의료민영화 일정들로 빼곡했습니다. 그런데 당황스럽습니다. 제 다이어리는 온통 ‘*** 읽어보기, 파악하기’ 정도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열심히 의료민영화 반대를 위한 활동을 벌였다면 좋았겠지만, 솔직히 내용을 따라가기도 힘들었습니다. 2014년 진화한 박근혜 버전의 의료민영화 바이러스는 전보다 한층 교묘해졌기 때문입니다. 촛불이라는 항생제에 내성을 가지게 되면서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변이(變異)했습니다. 이 바이러스는 항생제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한층 교묘하게 항생제를 피해갑니다. 대통령령인 시행령을 개정하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의료산업화의 수혜자들은 자기 잇속을 챙깁니다. 잘 들여다보아야 ‘아, 의료민영화 법안이네’ 싶습니다만 대통령령이니 막기도 어렵습니다. 이렇게 은밀하게 위대하게 그들은 밥그릇을 어마어마하게 키워가고 있습니다.

보건의료노조, 의료민영화 안돼요

[28일 오후 서울 용산구 동자동 서울역광장에서 보건의료노조가 연 ‘의료민영화저지 총파업 총력투쟁 결의대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아프면 여지없이 주머니를 털리게 되는 국민들이나 의료산업화에 양심과 영혼을 털리게 되는 보건의료인들은 고군분투 했습니다. 세월호 참사, 군인권 문제, 재보궐 선거, 통합진보당 해산 등 거대한 사건들이 많았고, 여당에게 불리할 법한 정세를 모두 의료민영화 추진세력인 새누리당이 주도했던 탓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약사로서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저로서는 최소한의 안전과 건강이 보장되지 않는 이런 현실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평상시에는 국민들로부터 밥그릇 챙긴다고 비판받던 의사협회, 치과의사협회, 약사협회들까지도 의료산업화에 빨대를 꽂은 주주들과 그들과 일심동체로 움직이는 정치세력 앞에서는 약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에 칼까지 그어가며 저항했던 의사협회는 결국 꺾여버리고 원격의료 시범사업을 남긴 채 잘 보이지 않습니다. 네트워크 치과들로 의료산업화를 목전에 두고 있던 치과협회는 여느 단체보다 강경한 발언을 이어가며 의료민영화 반대 활동을 해온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지난 10월 압수수색을 당한 후 역시 잘 보이지 않습니다. 참으로 주도면밀한 정부입니다. 제가 속한 대한약사회 역시 영리법인약국 허용, 원격의료 등 산적한 현안이 수면 밑에 있어 살얼음을 딛고 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시민사회단체도 마찬가지로 보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해야할 시기에도 터져 나오는 이슈를 막기에 분주합니다. 성명서가 사흘이 멀다 하고 나오는데도 의료민영화 법안 역시도 사흘이 멀다 하고 쏟아집니다. 이 정도면 내용을 파악하고 성명서를 쓰기에도 벅찰 정도로 보입니다. 병원 매각과 인수합병을 허용하는 법안, 경북대병원 노조 파업, 진주의료원 폐업 확정,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신의료기술 평가 면제, 병원협회장 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임명…

누군가의 건강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팔고자 하는 자들은 참 열심히도 사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열심히 사는 사이 우리가 탔던 배들 하나하나와 학익진을 이루던 시민사회의 대열이 흐트러져 버린 것 같아 그것이 가장 안타깝습니다. 1년이 지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함께 걸어가던 서로가 잘 보이지 않고 시꺼먼 까마귀들만 보이는 기분이랄까요.

함께 싸우던 그 때가 그립습니다

2015년, 참 그립습니다. 우리가 함께 싸우던 그 때가 참으로 그립습니다. 진보정당들이 한 솥밥을 먹으며 앞장서서 창과 방패로 싸우면 시민사회단체들이 각자의 색깔로 활을 쏘고, 후방에서는 보건의료인, 국민들도 함성으로 지지해 나서던 때가 그립습니다. 하얀 가운을 입고 이윤보다 생명을 외치며 파란 조끼 빨간 조끼 노동자들과 함께 서로의 이야기를 외치던 거리가 그립습니다.

무조건적인 연대가 그립습니다. 민중을 위한다는 뜻 아래에 서로의 차이를 넘어 어깨 걸고 싸웠던 그 때가 그립습니다. 생각의 차이보다 진심의 깊이를 믿고, 서로가 있음에 감사하던 때. 가끔은 치열하게 논쟁하며 어느 단체가 잘하나 질투도 했던 그 때가 그립습니다.

2015년에는 쌍용차의 굴뚝에도, 세월호 유가족들의 천막에도, 동성애자 인권을 위한 현장에도… 함께 살자는 모든 현장에서 생각의 차이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손 맞잡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건강으로 돈을 벌고자 하는 그들만큼이나 건강은 결코 이윤의 논리가 아니라고 외치는 우리도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겐 아직 12척의 배가 남았으니 그들만큼이나 악착같고 치열했으면 합니다. 2015년은 우리가 함께 허물어야할 큰 벽만 남고 모든 작은 벽이 낮아졌으면 합니다. 제발 그랬으면 합니다.

민중의 소리 / 최진혜 늘픔약사회 대표